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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감원 "조선업계 키코 신고 없다"…왜

정부 재수사 방침에도 금감원에 접수된 조선업계 사례 '제로'
RG발급 등 조선사 '생명줄' 쥔 은행권에 피해보상 요구 불가

신주식 기자 (winean@ebn.co.kr)

등록 : 2018-12-11 14:57

▲ SPP조선 사천조선소 전경. SPP조선은 한때 현대미포와 함께 글로벌 석유제품선 시장을 양분하던 조선소였으나 은행권의 RG 발급이 이뤄지지 않아 지난해 3월 마지막 선박 인도와 함께 문을 닫았다.ⓒEBN

정부의 재수사 방침이 정해지며 향후 방향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키코(KIKO, Knock-In, Knock-Out) 사태에 대해 조선업계의 피해신고는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건실한 중소기업들이 '흑자도산'으로 무너지는 빌미가 됐던 키코사태로 인해 국내 중소조선사들도 재기불능의 상태로 내몰렸으나 키코를 권했던 은행권이 채권단으로 있는데다 선박 발주에 필수적인 선수금환급보증(RG, Refund Guarantee)를 발급하는 상황에서 키코에 대한 이의제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금융감독원은 현재 4건의 키코 피해사례를 접수하고 조사를 진행 중이다.

금감원이 10년 전 발생했던 키코사태를 재수사하게 된 것은 정치권의 영향에 따른 것이다. 지난 2017년 9월 정무위원회 소속이었던 박용진 의원이 "키코사태야는 대표적인 금융적폐 사례"라고 지적했으며 이에 대해 이낙연 국무총리가 "법무부장관과 협의해 재수사 여부를 판단하겠다"고 대답했다.

이후 금융행정혁신위원회에서 키코사태 재수사를 권고했으며 금감원은 올해 6월부터 전담반을 설치해 법원에서 판결받지 않은 키코 피해기업의 신청을 받아 조사에 나서고 있다.

파생금융상품인 키코는 환율의 상한선(Knock-In)과 하한선(Knock-Out)을 정해 그 범위 안에서 변동하면 정해진 환율을 적용받는다. 그러나 환율이 하한선 이하로 떨어지게 되면 계약이 무효가 되고 상한선 이상으로 올라갈 경우 약정액의 2배 이상을 약정환율에 팔아야 한다.

은행들은 이 상품을 팔아 부족한 달러보유고를 채울 수 있는데다 환율이 상한선 이상으로 오를수록 수익이 급증하지만 반대의 경우 계약은 무효가 되므로 리스크가 없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은행권에서는 지난 2007년부터 중소기업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영업에 나섰으며 2008년 하반기 리먼브라더스(Rehman Brothers)로 대표되는 금융위기로 환율은 폭등했다.

이와 같은 리스크에 대한 설명 없이 키코 상품에 가입했던 기업들은 영업실적이 건전했음에도 불구하고 환율급등에 따른 키코 손실로 인해 '흑자도산'에 내몰렸다.

지난 2012년 민병두 의원실과 언론에 따르면 키코사태로 피해를 입은 기업은 776개사, 부도를 맞거나 파산한 중소기업은 110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은행권의 대출과 보증에 의존해야 하는 조선업계, 특히 중소조선사들은 키코 가입권유를 외면할 수 없었다는 것이 업계의 지적이다.

금융위기 이후 선박 수주협상에서 글로벌 선사들이 주도권을 잡기 시작하면서 선박 건조 등 운영자금 마련을 위한 대출은 불가피했으며 은행권은 수주계약에 필수적인 선수금환급보증(RG) 발급에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대형 조선소보다는 21세기조선과 같은 중소조선사들이 RG 발급에 어려움을 겪게 됐으며 은행들은 RG 발급을 조건으로 키코 가입을 권하는 '키코 꺾기'에 나섰다.

업계 관계자는 "은행이 RG를 발급하면 이에 따른 수수료를 받는데 선박 가격이 척당 수백억원에 달하므로 RG 수수료 규모도 상당한 수준이었다"며 "호황기 당시 RG 발급실적이 우수한 은행 직원은 승진에도 유리해 치열한 영업경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경기가 침체되면서 은행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RG 발급을 외면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RG 발급을 요청하기 위해서는 대체로 지방 조선소에서 은행 본점이 있는 서울로 가야 하는데 임원이 자리를 비우기 쉽지 않아 대리급 직원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며 "RG를 신청하러 갔는데 키코라는 파생금융상품 가입을 권유받는다면 이를 거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지난 3일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2018 금융감독원 키코 재조사 및 피해기업 구제방안 토론회'에 참석한 문귀호 전 21세기조선 회장의 이야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발표자로 나선 문 전 회장은 "키코사태로 21세기조선이 3800억원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조선소가 정상적인 영업을 유지한다는 가정 하에서도 20년 이상을 운영해야 복구가 가능한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업계에서 발생한 키코 피해는 아직까지 단 한 건도 금감원에 접수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은행권은 키코손실로 자금유동성 위기에 빠진 조선사의 지분을 인수해 채권단이 됐으며 조선소 운영자금 대출, RG 발급 등 조선사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상황이다. 10년 전 금융위기 당시와 마찬가지로 현재도 조선업계에서 키코 피해를 주장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현재 4건의 피해사실을 접수받아 조사에 나서고 있지만 조선업계에서 접수된 키코 피해사례는 없다"며 "계약서 등 사실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있어야 피해여부를 조사할텐데 접수 자체가 이뤄지지 않은 이상 조선업계 키코사태에 대한 조사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피해가 발생한 시점에서 바로 신고나 소송절차에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겠으나 조선업계로서는 은행권에 이처럼 대응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며 "시간이 많이 지나서 계약서도 남아있지 않거나 이미 파산한 기업의 경우 피해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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